법정 - 무소유
- coolnpeace life/만권의 추억
- 2026. 5. 9.

범우문고 한 권이 손에 들렸다.
고등학생이었다. 범우문고는 얇고 가벼웠다. 들고 다니기 좋고, 읽다 덮기도 쉬웠다. 법정이라는 이름도, 무소유라는 말도 그때는 별 무게 없이 들어왔다. 책을 고르는 데 큰 이유는 없었다. 그냥 손에 잡혔고, 그냥 읽었다.
그런데 1년에 한 번씩 떠올랐다.
관습적으로 책을 읽던 시절이었다. 읽어야 하니까 읽고, 고를 때도 크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 책은 달랐다. 의식하지 않아도 계절이 바뀔 때쯤 어디선가 떠올랐다. 특히 가을이 오면. 법정은 썼다. 이 가을에 몇 권의 책을 읽겠다고, 술술 읽히는 책 말고 읽다가 자꾸만 덮이는 책을 골라 읽겠다고. 그 구절이 나를 건드렸다. 좋은 책은 거침없이 읽히는 책이지만, 진짜 양서는 읽다가 자꾸 덮이는 책이어야 한다는 말. 책이란 거울이어야 한다는 말. 고등학생이었던 나는 그 말의 무게를 다 알지 못했지만, 어딘가에 남아 있었다.
지금 이 책은 책장의 시작점에 있다.
책장을 비우다가 손이 멈췄다. 버릴 책과 남길 책을 나누던 어느 날, 이 얇은 책을 다시 꺼내 들었다. 그때 알았다. 이 책이 나의 시작이구나. 비우는 작업을 하다가 비움의 책을 만난 것이다. 아이러니라기보다는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소유는 아무것도 갖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집착하지 않는 것, 그것이 무소유라고 법정은 말한다. 그 말이 지금의 나에게는 책장을 정리하는 일과 겹친다.
이 책은 떠나지 않는다.
많은 책이 손을 떠났다. 읽고 나면 자연스럽게 보내는 책이 있고, 남겨두어야 할 이유를 모르면서도 놓지 못하는 책이 있다. 무소유는 후자다. 1976년 초판이 나왔다. 법정스님이 세상에 떠난 이후에는 절판이라 다시 구하기도 쉽지 않다.
짐정리를 하다가도 다시 읽게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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