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리학 읽은 책 - 명리학 에세이 : 몸과 삶이 바뀌는누드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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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 11. 22.
명리학 어렵지 않다.
명리학의 기초 지식은 음양과 오행이다. 음양과 오행에서, 천간 10글자와 지지 12글자가 나온다. 천간은 목화토금수의 오행의 음양을 밝혀 기호로 나타낸 것이고, 지지 12글자는 12개월의 기운을 음양오행의 기운으로 펼친 것이다. 모두 음과 양의 속성을 지니고, 목화토금수 오행 중 하나를 가진다. 우주의 기운과 인간의 삶의 궤적이 다르지 않다는 전제로 만들어진 학문이 명리학이다.
특히 한자문화권, 성리학과 음양오행을 받아들인 동양문화권에서는 오행의 질서에 의해 사회가 돌아갔기에 명리학이 오랜 힘을 발휘했다. 조선시대까지는 왕과 시험에 합격한 권력층에게만 전해지다가, 일제강점기와 해방을 거쳐 누구나 자신의 운명을 볼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음양의 시작은 빛과 그림자를 이해하면 된다. 햇살을 받아 밝게 비추는 곳이 있으면, 햇살이 없는 곳은 어두운 곳이다. 앞으로 나아가려는 기질이 있는 양의 기질의 사람이 있다면, 한 발 물러서는 음의 기질인 사람이 있고, 봄처럼 새로운 것을 도모하려는 목의 기운을 가진 사람, 여름 처럼 뜨겁게 불타오르는 화의 기운을 가진 사람, 가을처럼 온도가 떨어지면 열매를 맺듯 질서를 강조하는 금의 기운을 가진 사람, 겨울처럼 웅크리며 상상력이 풍부한 수의 기운이 강한 사람이 있다. 음양 오행은 때에 따라 두꺼운 옷과 얇은 옷을 입으며 자연의 리듬에 맞추려는 이해만 있다면 누구나 익힐 수 있다. 자연과 멀어진 도시의 삶이 강해지기에, 낯설고 낯서니까 외국어처럼 어려워 보일 뿐이다.
명리학 기초를 익히고 난 후, 에세이를 써 볼 때 샘플로 좋은 책
처음 명리학을 공부하려는 사람에게는 천간과 지지 22글자를 익히기 보다 날씨에 귀를 기울이기를 권한다. 밝으로 활동하고 싶은 봄, 너무 더워서 견딜 수 없는 여름, 서서히 겨울이 오기 전에 아름다운 서늘한 가을, 추워서 집에 웅크리고 싶은 나의 몸의 변화의 리듬을 생각하면, 목화금수가 쉽게 이해된다. 목화금수는 디지털 시계처럼 변화는 것이 아니라, 아날로그 시계처럼 원을 그리며 움직이기에 천천히 다른 것으로 변화하게 도와주는 기운이 토, 그래서 동양은 서양의 4원소와 다르게 5가지를 가지고 세상을 설명하고, 인간을 설명한다.
명리학의 기초를 익히고 나면, 자신의 삶을 연,월,일,시 2글자씩 8글자로 이루어진 글자로 풀어낸 글을 읽어보면 좋다. 그럴 때 권하는 책이 <<누드 글쓰기>>와 <<다르게 살고 싶다>>이다. 둘 다 음양 오행의 기초적인 지식으로, 자신의 삶의 궤적을 설명하는 예문이 많다. 조금 더 기초적인 지식이 풍부하고 십신의 언어를 다채적으로 표현한 것이 <<다르게 살고 싶다>>라면, 대학원 이상이 학력을 지닌 이들이 길게 자신의 탐색에서 스스로 나아갈 방안을 고민한 에세이는 <<누드 글쓰기>>이다.
밑줄 긋기 : 자신의 삶을 면밀히 살핀 4개의 에세이 샘플
신금 비견과다의 글
61p. 할아버지도 혹시 신금 일간이지 않았을까? 신금 일간을 가진 사람은 대인관계가 어렵기로 유명하다. 분명하고, 정확하고 냉정한 게 장기이기도 하지만 자주 도를 넘어 독설과 냉혹함으로 치우친다. 표현력도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그들의 공통된 좌우명은 '복수는 나의 것'이다. 나서는 것을 싫어해서 대놓고 표현을 잘 못하는 반면 모든 일을 가슴에 차곡차곡 잘 담아 놓는다. 영화 <은행나무 침대>의 황장군처럼 놀랄 만한 인내력도 겸비하고 있다. 그렇게 십년 이고 이십 년이고 복수의 칼을 갈다가 불쑥 뛰어들어 상대를 난자해 버린다.
72p. 사주를 보면서 인디언들이 말한 '늑대의 지혜'에 관해 생각했다. 대개 짐승들은 위기를 만나면 뒤도 안 돌아보고 굴을 향해 내달린다. 그러다 보니 정작 자기가 처한 위험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모르기 때문에 그 위험은 부풀려진다. 그리고 동일한 패턴으로 계속 반복된다. 그러나 늑대는 아무리 일촉즉발 위기의 순간에도 늘 잠시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본다고 한다. 이를 통해 자기를 쫓고 있는 적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게 된다. 눈앞의 위험을 직시하고 거기서 의미를 발견해 내며 노력할 때 위험은 오히려 그의 미래를 힘껏 열어젖히는 힘으로 찾아올지 모른다.
사주는 늑대의 지혜로 보아야 한다. 오이디푸스처럼 거기서 예정된 신탁을 발견하려 들면 곤란하다. 기구한 팔자를 한탄해서도 안 된다. 그때 사주는 보는 이의 두려움과 나약함을 부추겨 댈 것이다. 사주를 돌아보고 대화를 시도해 보자. 그 속에서 나의 앞길을 환히 밝혀 줄 운명의 동반자를 발견하려 노력해 보자.
73p. 진정한 고생은 놀랄 만한 치유력을 발휘한다. 사람의 심적인 고민을 내려놓게 하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도록 강제한다. 기꺼운 마음으로 고생을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는 스스로에게 마법적인 치료를 허락하게 되는 것이다. 마음을 비우고 단순하게 주어진 일을 하라. 그러면 천지자연이 너를 들락거리며 절로 낫게 할 것이다!
... 운이 극에 이르면 다시 반대의 국면으로 전환된다는 믿음이 있고서야 두려움을 걷어 낼 수 있고, 두려움을 걷어 내고서야 그 길을 충실하게 즐기며 갈 수 있게 된다. 12년 전에 나는 화가 나서 돈을 마구 뿌려 댔었다. 그 결과로 애꿏은 내 친구들이 사고를 당했다. 아니나 다를까 작년에도 역시나 망할 조짐이 보이길래 나는 또 한 번 기꺼이 망해 보기로 결심했다. 그러고는 기쁜 마음으로 통장에 남은 돈을 모조리 나에게 쏟아부었다. ... 망할 때 쫄딱 망하고, 아플 때 한껏 아프며 주어진 고생길을 충실히 가는 것. 세상에 이만한 치료제가 없다. 그렇게 고생이 지나간 자리에 밝은 축복의 동이 터오게 된다.
78p. 내가 나고 자란 가부장 문화라는 환경, 그리고 여기에 나의 비겁과다형 사주가 더해진 것이 지금의 내 모습이다. 이 이중의 장애물을 뚫는 것, 그게 앞으로 내 삶에 주어진 과제이다. 크리스티안 노스럽의 조언처럼 그 길은 자신의 약점을 인정하고 솔직하게 바라보는 데서 시작된다. 그런 점에서 지금 하고 있는 사주분석 글쓰기는 퍽 좋은 용신인 셈이다. 네 기둥, 여덟 글자에 새겨진 내 존재의 바코드, 사주는 있는 그대로의 나의 모습을 돌아보게 하는 길잡이다. 서투르지만 나 자신을 글로 옮겨 보면서 참으로 오랜만에 스스로와 담담하게 마주한 경험을 했다. 과연 그것이 내면의 인도자로 돌변해 생의 최고의 경이를 맛보게 해줄는지!
81p. 이십 페이지 남짓하는 이 그을 장장 일 년에 걸쳐서 썼다. 이건 정말 고통스러운 작업이었다. 왜냐? 나조차도 잘 모르는 나의 과거를 까발려야 했으니까! 그건 미래의 불행을 염려하는 것보다 더한 고통을 줬다. 글감이 생각이 안 날때는 생각이 안 난다는 이유로, 생각이 나면 또 그 일이 수반하는 감정 때문에 힘들다. 잊고 있던 옛 기억의 돌부리에 걸리는 맛은 생각보다 맵다. 그런데 더 힘든 건 그걸 글로 써야 한다는 것이다. 감정의 흙탕물을 가라앉히지 않고 너저분한 상념의 덩어리를 그대로 뱉어 냈다간 내 말에 내가 다친다. 무엇이건 글을 쓴다는 건 그 사건을 장악해 내 식으로 해석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글은 글대로 안되고 괴로움은 곱절로 늘어난다.
... 글을 쓰면서 내가 쓴 용신파트가 너무 부실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글을 고치면서 용신 파트에 손을 댈까 했다. 분석을 했으면 응당 개선방안을 제시해야 하는 것 아닌가. 옛 일을 돌아보기에 급급했지, 이 글엔 결론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곧 그게 부질없는 것임을 직감했다. 망각하고 있던 과거지사를 들춰서 분석해 보는 것, 이것이야말로 용신이다. 일간이 뭐건, 고립이 뭐건 누구에게나 들어맞는 만인 공통의 용신! 지키지 못할 공약 남발해서 구업을 쌓지 말고, 그저 나 자신을 들여다보는 일에 집중할 일이다.
관성과다형 인간의 글
85p. 관성은 세 가지 형태로 드러난다. 첫째는 극 없는 생이다. 도무지 힘들게 하는 것은 찾아볼 수 없고, 편안하게 나를 살찌우는 경우라 하겠다. 엄마가 다 챙겨주는 마마보이, 마마걸이 그렇다. 이는 물고기를 잡아다 입에 떠먹여 주는 것과 같다. 둘째로는 극을 통한 생이다. 직접 부딪치면서 체득한 배움이다. 자전거나 수영은 넘어지고 물 먹는 극의 과정을 통해 익힐 수 있다. 스스로 물고기 잡는 법을 배운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생과 극은 대립되는 요소가 아니다. 스스로를 살찌우는 두 가지 방식인 것이다. 강좌나 세미나에서도 생극의 원리를 발견할 수 있다. 일방적으로 선생의 말을 듣는 강좌는 극 없는 생이다. 가만히 앉아 있으니 불편할 게 별로 없다. 열심히 안 한다고 누가 뭐라 하지도 않는다. 그러다 보니 잠이 잘 온다. 반면 세미나는 한 사람이 가르치기보다 함께 이야기하는 토론 자리다. 언제 자신에게 질문이 들어올지 모르기에 강좌에 비해 집중력과 긴장감이 고조된다. 이건 극을 통한 생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강의든 세미나든 스스로 극할 수 있는 점을 만든다면 생이 더 잘될 것이다. 발표, 발제, 질문 등은 귀찮고 힘들지만, 하고 나면 기억에 더 많이 남듯이 말이다. 이처럼 생극은 일상 속에서 항상 벌어지고 있다.
87p. 한 번은 유치원에 갔다가 바로 집에 돌아온 것을 보고 어머니가 무슨 일이냐고 물으셨다. 나는 대답했다. "유치원 문이 안 열려서요." 유치원에 갔다가 문을 슬쩍 밀고는 잘 안 열리자 그냥 내뺐던 게 아닐까 싶다. 그만큼 확 트인 공간, 사람들과 접촉하는 것에 근원적 두려움이 있었나 보다.
관성은 심리적으로 브레이크 장치와 비슷하다. 자신을 극한다는 것은 자기제어의 심리가 강하다는 것이다. 뭘 하려고 해도 걸리는 게 참 많다. 이건 이래서 안 되고, 저건 저래서 어렵고...... 이유가 많다. 자동차가 전진하려면 엑셀을 밟아야 하는데, 전후 좌우를 살피고 조금이라도 이상 신호가 발생하면 어김없이 브레이크를 건다. 대인관계는 예측할 수 없는 세계이다. 끝임없이 새로운 자극에 대처해야 하기에, 관성과다인 사람은 그럴 때마다 일단 정리하고 상황을 주시한다. ... 좋게 말하면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지만, 실상은 뒷북의 제왕이다. 상황 파악을 완벽하게 해야 비로소 움직이니 이래저래 타이밍이 안 맞을 때가 허다하다. 그래서 만사 시작하는 것을 어려워한다. 완벽한 준비를 꾀하나 어쩌다 찾아온 기회는 기다려 주지 않는다.
96p. 관성은 스스로를 극하여 불편하게 만든다. 자기를 힘들게 하는 것은 사람마다 모두 다르다. 여러 고민의 종류가 있겠으나, 가장 깊숙이 심기를 건드리는 불편함은 바로 자신과의 약속을 깨는 일이라 생각한다. 자기와의 약속, 지키지 않았다고 누가 뭐라고 하지 않으나 본인은 알고 있다.
97p. 모든 분야가 그렇든 초심자에게 기본기는 중요하다. 운동이 기본자세를 반복해 몸에 배게 하는 것처럼, 학문도 기초용어와 개념을 암기해 입에서 술술 튀어나오도록 해야 한다. 출퇴근 할때나 집주변 남산을 산책할 때면 외울 범위를 웅얼웅얼 지껄였다. 경혈자리를 암기하는 것은 특히 어려웠다. 그런데 꾸준히 스스로 정한 약속을 매일같이 수행하니,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짚어졌다. 그때 나는 '아, 이것이 자유로구나.' 그렇게 안 외워지던 몸의 혈자리가 불쑥 떠오르며 암기가 되자 써먹을 수 있었다.
98p. 책임감은 강하나 책임질 일은 안 한다.
지키기 어려운 약속은 좀처럼 하지 않는 관성과다는 자꾸 움츠러들고 편하고 익숙한 환경에만 있으려 한다. 정체되고 발전이 없다. 책임강이 강한 자가 자기 책임질 일을 하지 않으니 무조건 어떤 일을 맡고 볼 일이다. 맡은 바는 철저히 완수하니, 다소 피곤해도 자기의 성장에는 도움이 된다. 그러나 과도한 책임감 또한 관성과다가 덜어 내야 할 부분이다. ..... 흔히 하는 '그냥 내가 하고 말지'라는 푸념은 일상에서 곧잘 쓰는 말이다. 그런데 이 말은 참으로 무능한 자기고백에 불과하다. 다른 이를 믿지도 못하고, 일을 나눠서 효과적으로 할 수 있는 지혜도 부족한 것이다. .. 왕따가 남들에게서 소외당하는 거라면, 이는 자따, 즉 스스로 남들을 소외시켜 자발적으로 고립되는 일이라 할 수 있다.
112p. 결국 나는 온몸이 불구덩이라는 소리다. 여름마다 정신을 못 차려 우유 탄 물 같은 정신으로 살고, 음시만 먹었다 하면 얼마 안 가 바로 소화시켜 화장실에 가고, 들어오는 돈 역시 잘 모으지 못하고 바로 소비해 버리고, 눈 요기를 좋아하고 겉치장을 중요시하는 것이 모두가 맹렬히 타오르는 화덕과 그 위에서 너울거리는 불꽃 덕분이리라.
식상은 또 일에 대한 욕망을 의미하기도 한다. 식상이 많으면 일을 잘 벌이고, 뭐든 조금만 배우면 자꾸 써먹으려 한다. 반면 식상이 없으면 공부든 일이든 열심히는 하는데 그 결과물을 내는 것에는 상대적으로 서툴기 마련이다. 그런데 하나가 많으면 하나는 부족한 게 우주의 법칙! 식상이 적은 사람은 대개 인성과다형이다.
119p. 하지만 더 곤란한 건 우울증이다. 어렸을 때부터 만사가 귀찮고 허무해 변덕도 잘 부리고 금세 포기하고 곧잘 짜증내고 무리에서 혼자 떨어져 있고는 했다. 크면서 조금 사회성을 키우기는 했지만, 주기적으로 극도의 우울증이 찾아오는 건 막아지지 않는다. 활활 타오르는 불꽃과 식상이 만들어 준 능력으로 이것저것 생각나는 것들을 해보다가, 어느 순간 문득 찾아온 물음표와 함께 일체의 동작을 정지하고 마는 것이다. 그때부터 하는 일은 배가 터질 때까지 고통스럽게 무언가를 자주 먹거나, 만화책이든 게임이든 단순한 것에 빠져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한동안 시간을 보내고 나면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곤 했으므로, 지난해 2010년에도 나는 그런 식으로 넘어가려 했다.
127p. 물질을 에너지로 바꾸는 데 있어 지대한 공을 갖는 인슐린은 췌장에서 생성된다. 인슐린이 과다 분비되면 췌장이 급 피로해지는데, 이럴 때 조심해야 할 것이 당뇨와 저혈당증이다. 배가 고프면 금세 손을 벌벌 떨고, 몸 좀 움직였다 싶으면 피로해지는 나를 이 대목에서 한 번쯤 의심해 볼 만하다. 혹시 목는 것에 비해 살이 안 찌는 체질 역시 이와 연관된 건 아닐까. 생각해 보니 돌아가신 할머니도 당뇨와 그 합병증으로 고생하셨고, 살아 계신 외할머니도 현재 당뇨 때문에 고생 중이시다. 당뇨병은 유전이라는 말, 내 외모가 할머니를 닮았다는 집안 어른들 말씀이 갑자기 메아리가 되어 울려 퍼진다.
137p. 순간 순간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것은 그야 당연하다. 그런데 그걸 위해서라도 가장 필요한 것은 다른 무엇도 아닌 관, 즉 보는 것이다. 상황을 잘 보는 것, 그 순간의 내 마음을 객관적으로 보는 것, 내가 어떻게 행동하고 있는지 냉정하게 보는 것. 그렇게 볼 수만 있다면 나는 지난 미월을 그토록 처참하게 내 안에 구성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고, 다시 올 미월을 그때와 같은 꼴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똑같은 꼴을 당한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게으르다는 증거다. 같은 사건이라도 나 자신이 달라진다면 얼마든지 다르게 변신 가능하기 때문이다.
140p. 연애하다가도 아버지가 쓰러지자 그 말을 꺼내기가 귀찮고 싫어 차라리 말없이 연락을 끊는 쪽을 택했고, 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는 말을 했더니, "슬펐어?"라고 묻는 친구가 유치원생처럼 느껴져 더는 연락하지 않았다. 요컨대 제 흉한 꼴 보이기 싫고 남의 흉한 꼴도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 관이 없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 주는 예다. 관성이 없으니 인생을 생해 줄 수 없고, 인성이 허약하니 식상을 극해 줄 수 없다. 끝나지 않는 악순환, 그러는 사이 내 몸과 마음은 점점 석화되어 간다. 타인에 대한 감응력은 점점 더 떨어지고, 초보적인 스트레칭에도 온몸이 비명을 지른다. 손과 발 사이는 너무나 멀고, 두 다리는 서로 붙어 떨어질 줄을 모른다.
141p. "하고 싶은 일에 대해서는 그렇게 집중하면서, 조금만 거기에서 비껴나면 완전히 무심해진다." 선배 생각에 그건 내무 외로운 삶이란다.
... 내가 타고난 기운들을 어떻게 쓰고 있는지 이보다 잘 보여주는 게 있을까. 비견과 겁재 없이 변화 단독이라, 나는 처음부터 동료나 형제 자리는 비어 있는 채로 도와줄 사람도 티격태격할 사람도 없이 살게 된다. 무리에 대한 갈망은 있지만 현실적으로 잘 끼지 못하는 사람도 있고, 그럴 마음 자체가 별로 없는 사람도 있을 텐데 내 경우는 둘 다인 것 같다. 그런 데다 사회적 관계를 의미하는 관성 수 기운도 없다. 지장간에 숨어 있지도 않다. 무엇보다 큰 문제는 토, 특히 월지 미토가 그야말로 대박이다. 월지 미토는 계절상 한 여름이다. 한여름의 뜨끈뜨끈한 미토, 심지어 때는 미시, 한낮이다. 이게 모든 관계를 불로 뒤덮어 버린다. 그나마 눌러 줄 목 기운마저 역으로 제압했다. 재주가 있어도 끈기가 없고, 화려함을 추구하나 홀로 고독하다. 말하자면 주변에 사람 하나 없이 혼자 훨훨 불타며 살다 죽을 팔자다. 몸은 몸대로 안 좋아지고, 관계도 파탄 날 형국, 이래서 운을 여는 게 필요해진다.
142p. 몸의 근육을 키울 때 사람들은 어떻게 하나? 매일같이 부단히 제 몸을 움직인다. 자신이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되는 거다. 공부의 근육도 마찬가지다. 내 눈으로 직접 읽고, 내 입으로 직접 질문하고, 내 머리로 직접 생각하고, 내 손으로 직접 써야 한다. .. 질문하고 글 써야 한다. 공부에서는 그게 매듭이다. 이 매듭이 없이 공부는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지 않는다. 안 만들어지는 매듭을 만들고 애쓰고 또 애쓰는 사이 공부 근육이 조금씩 붙는 것이다. 그렇게 어렵사리 한 번 매듭을 짓게 되면 두번째 세번째에서는 훨씬 수월해진다. 훨씬 깊어진다. 근육이 생기고 근력이 강화되면 자세가 달라지고 수면이라든가 식사 등 생활 자체가 변할 수 밖에 없다. 공부도 마찬가지다. 어떻게든 달라진다. 달라져야 한다. 사람과의 만남이 달라지고, 눈에 보이는 것이 달라지고, 취향이 달라진다.
143p. 관을 쓰는 공부란 함께 하는 공부다. 세미나나 스터디 모임 등을 떠올리면 쉬울 것이다. 함께 공부하면서 관계를 만들고, 서로 생해 주고 극해 준다. 독학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관계를 만들고 서로 생해 주고 극해 준다. 독학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 함께 공부하는 것! 그러니 내게는 지금 이곳이 참으로 좋은 수행처인 셈이다. 미친 듯이 싸우고 화내고 그러면서도 같이 일하고 공부하고...... 정말 피곤한 일상이지만, 그러나 그렇게 살면서 하루하루 덜 고독해진다고 느낀다.
146p. 일이 많으면 생각할 여유가 없고, 일을 줄여야 자신을 돌아볼 여유가 생긴다고 사람들은 믿는다. 그러나 오히려 그 반대다. 해야 할 일에 온전하게 집중해 충실하게 살 때는 망상이 사라지고 생각 - 질문 혹은 화두는 길어진다. 그러나 몸을 움직이지 않은 채 유유자적 머리만 굴리고 있노라면 늘어 가는 건 오직 스스로를 괴롭히는 잡생각들 뿐이다. 이런 잡생각들을 사유나 고뇌라고 착각하지는 말자.
그러니 묵직한 토 기운을 빼야 한다. 토를 다른 기운으로 전환해 줘야 한다. 그게 금이다. 일을 벌이는 게 식상이라면 그 일에 매듭짓는 건 재성이다. 바지런함과 끈기가 여기서는 중요한 덕목이 된다. 그러나 욕심이나 조급증은 금물. 욕심과 기대로 심장을 뜨겁게 만들면 일을 벌이는 건 가능하지만 일을 매듭지을 수는 없다. 재성을 제대로 쓴다는 건, 벌인 일이 쉰내 풀풀 풀리는 술떡으로 변하기 전에 마무리하는 거다. 제때에 제대로 매듭짓기. 최대한 공을 들여, 적정한 때에 맞춰서.
151p. 운명적으로 살려면 무엇보다도 게으르지 않아야 한다. 나아가고, 생각해야 한다. 그래야 할 때, 비로소 나는 삶 속에서 종종 찾아오는 실패도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이렇게 놓고 보면 수행은 무엇보다도 이를 위한 힘을 기르는 과정인 셈이다. 수행하면 자기 명을 탓하지 않을 수 있다. 주어진 명 속에서 최선을 다하고, 결과가 어찌되었든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 니체가 말한 '운명애'가 이와 다를 게 무언가.
154p. 아픈 몸이야말로 스승이고 벗이다. 상처 입은 기억이 인간을 질문하게 하고 생각하게 하는 것처럼, 아픈 몸도 인간을 그렇게 바꿔 준다. 흉이 길로 바뀌고, 아픔이 성장으로 바뀌는 이 마법과도 같은 순간! '누드 글쓰기'에서 나는 길흉은 없다고 말했다. 재미있다. 말하고 나니 그걸 증명할 기회가 기다렸다는 듯 나타났으니.
155p. 글은 타인에게 보여주고 소통하기 위한 매체이지만, 그 이전에 나 자신과 나누는 소통이다. 나를 보고, 내게 묻고, 그에 대해 오롯이 내가 답하는 시간이 글 쓰는 과정이다. 속이려면 속일 수도 있겠지만, 애써 무시하거나 얼머무릴 수도 있겠지만, 만약 정말 제대로 글을 쓰겠다고 한다면 그때 우리는 어떤 결단을 내려야 한다. 고작 한 두 장 짜리 글을 쓰면서도 멷 번이나 그런 결단의 순간이 찾아올 수 있다.
156p. 과거의 상처가 어쩌고저쩌고 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참 많다. 내가 싫어하는 몇 몇 국내 소설들을 봐도 과거의 상실감이 아직까지 주인공의 발목을 붙들고 늘어진다. 커서 그런 사람이 될까봐, 나는 십대들과 만나 공부할 때면 늘 글쓰기를 가르쳤다. 글쓰기는 무엇보다도 햇볕에 널어 말리는 과정이라고 역설했다. 보물도 아닌데 애지중지 싸매고 품고 있다가 다 썩어 냄새피우지 않게, 비밀도 상처도 적당한 때 바깥에 꺼내 말리라고.
자기 이야기를 글로 만들고 나면 그때 그 글은 더 이상 자기만의 과거가 되지 않는다. 이제 그것은 엄연히 바깥에 존재하는, 나와 어느 정도 거리가 있는 사물이 된다. 우리는 그 거리감을 확보하기 위해 글을 쓰는 걸지도 모른다. 거리감이 있어야 보다 객관적으로 대상을 볼 수 있다. 그래야 거기에 끄달리지 않게 된다. 심지어 거기에서 배움을 얻었노라 말할 수도 있게 된다. 허나 신기하게도 우리는 그걸 하지 않기 위해 무던히도 애쓰고 있지 않나. 생각하지 않기 위해. 생각한다는 제스처만 취하면서, 혹은 착각하면서.
재성과다의 글
162p. 일단 광증이 나서 분을 삭히지 못하는 것은 사주상 화가 치성할 때 사람에게도 나타나는 병증이다. 사주상 화가 치성하고 그것을 제어할 물이 없으면 화는 모두 위로 뜬다. 불은 위로 올라가려는 성질이 있기 때문이다. 이 불이 머리까지 올라가서 내려오지 않으면 정신병이다. 일정한 방향이 없이 제멋대로 타오르는 불처럼 정신도 그렇게 써 버린다는 말이다. 그러니 광증이 나 있는 상태는 이런 내 사주의 현현이 아닐 수 없다.
163p. 병화는 소유와 집착의 화신이다. 남이 나보다 많이 가진 꼴은 죽어도 못 본다. 이런 감정도 절대 숨기지 않는다. 그냥 시원시원하게 질러 주신다. 한번은 집에서 중학생이 된 누나에게 자전거를 선물해 준 일이 있었다. 면소재지에 있던 중학교에 다녀야 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때 나도 자전거가 있었다. 하지만 새 자전거를 보자마자 나도 모르게(?) 새것이 갖고 싶어져서는 내 자전거를 해머로 부수기에 이른다. 기어이 기어 10단이 장착된 자전거를 쟁취하고 나서야 이 해머질은 멈춘다. 이미 난 어린 나이부터 철저하게 병화로 살고 있었던 셈이다. ... 운동을 할 때도 화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병화에겐 화려함이 생명이기 때문이다. 어디서든 화려한 플레이로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아야 한다. 허나 누군가 나보다 화려한 플레이를 하면 열이 받아서 참을 수가 없다. 경기 중에도 그를 꺾기 위해 별짓을 다한다. 꺽지 못하면 지옥불에라도 떨어뜨려야 한다. 운동만이 아니라 뭘 해도 그렇다. 내가 화려하거나 혹은 너를 죽이거나. 이 길을 가로막는 자는 누구라도 다친다. 병화에게 중도는 없다.
165p. 다른 이유도 있겠지만 허리디스크는 신장이 약하면 생기기 쉬운 병이다. 신장은 우리 몸에서 뼈와 골수, 기타 신진대사에 필요한 물을 관장한다. 척추의 마디마다 들어 있는 물렁뼈도 이 신장은 소관이다. 신장에 문제가 생기면 몸의 물이 말라 뭉치거나 굳게 되는데 이 상태가 오래되면 허리의 디스크들이 튀어나온다. 자기도 좀 살겠다고 발버둥치는 것이다. 더 이상 이 상태로 가면 너 죽는다는 신호. 더구나 나는 사주상 수가 없어서 신장도 약하다. 이걸 모르고 불로 신장에 있는 물을 모조리 말려 주셨으니 어찌 몸이 온전할 수 있겠는가.
178p. 사주에 고립이 있으면 일단 괴롭고 힘들지만 그걸 푸는 방법을 제대로 터득하면 남부렇지 않게 그것을 사용할 수도 있다. 고립도 그 용법을 어떻게 하느냐가 문제라는 말이다. 고립으로 이핸 문제가 발생하고 어머니가 아프고 공부와 담을 쌓고 살기도 했지만 바로 거기가 구원처가 될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내 안에 막힌 곳을 뚫는 것, 사실 이게 개운의 핵심이 아닌가.
... 목이 고립되어 있는 사람들은 방향을 잘 잡지 못한다. 나무가 한 방향으로 쭉 뻗어나가듯 목은 방향성을 상징한다. 그런데 이게 고립되어 있으니 방향을 잡지 못하고 헤맬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더구나 나는 화의 기운이 많은지라 이것저것 불처럼 해야 직성이 풀린다. 사실 이게 산만한 거다. 하나를 집중해서 뚫는 힘, 씨앗이 한 점에 집중해서 땅을 뚫고 나와 하늘을 향해 뻗어 올라가는 힘, 이 기운을 어떻게든 부여잡아야 목의 기운도 쓰고 나의 인성도 고립으로부터 자유로워질 것이다.
일상에서도 그렇다. 목은 오행에서 시작하는 기운이다. 그런데 목이 고립된 사람들은 시작에 어려움을 겪는다. 주저주저하게 되고 한 발 내딛는 걸 잘 못한다. 그러니 목이 고립된 사람들은 의식적으로라도 뛰어드는 힘을 써야 한다. 시작에 두려움을 느끼고 자꾸 뒤로 물러나려는 자신을 채근해야 한다는 말이다. 공부뿐만 아니라 일상에서도 목의 기운을 발휘하는 것, 이것이 고립을 풀고 정이품송을 길러내는 지름길이다.
182p. 수가 부족해서 생기는 것들을 일관되게 관통하는 것이 하나 있다. 바로 두려움이다. ... 화려하고 활발한 모습 이면에 두려움을 감추기 위해 겉을 더 화려하게 포장한다는 것이다. ... 관성은 사회적 관계 속으로 나를 밀어넣어야만 제대로 작동한다. 그런데 이 관계들 속으로 들어가지 않으려고 하는 것. 사실 이건 대부분 큰 두려움 때문이다.
187p. 내게는 말을 질질 끄는 습관이 있다. 말이 원래 느리기도 하지만 말을 또박또박 하지 못하고 끄는 습관은 숱한 원성을 불러왔다. 이럴 땐 책을 소리 내서 읽고 의식적으로 말을 끌지 않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책을 소리 내서 읽다 보면 입안에 침이 고이는 것을 느끼게 되는데 이는 수 기운이 위로 올라오기 때문이다. 그럼 자연스럽게 화 기운은 밑으로 내려간다. 더구나 이렇게 하면 발음도 좋아진다. 그래서 내가 앞으로 해야 할 건 하루에 한 시간씩 책을 소리내서 읽는 연습이다.
189p. 사주명리로 과거를 재구성한다는 것은 예전의 시간들을 지금까지와는 다른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일이다. 또한 과거를 완전히 다르게 경험하게 되는 체험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왜 이 일은 즐겁고 행복한 일이 아니라 고통스러운 일로 다가왔을까. 결국 과거와는 별반 다르지 않게 살아가고 있는 지금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보였기 때문은 아닐까. 누드 글쓰기는 아마도 이런 현재의 나와 대면해야만 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글쓰기를 마치고 난 지금, 나에겐 아이들이 사주를 가지고 유쾌하게 웃고 떠들던 모습이 하나의 과제처럼 남겨져 있다.
190p. 내 운명에 대해 쓴다는 것은 그들과 얽혀 있는 그 운명에 대해서 쓰는 일이기도 했다.
우리는 흔히 습이라는 말을 많이 쓴다. 습은 한자로, 날개 우자와 흰 백자가 합쳐진 글자다. 여기엔 새가 날기 위해 날갯짓을 수백 번, 수천 번 연습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지금 내가 가진 습은 과거 수천, 수백 번의 노력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일 게다. 반대로 지금의 이 누드 글쓰기는 그 습에서 벗어나기 위해 새로운 습을 만드는 과정에서 탄생했다. 부디 그것이 습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을 때까지 계속되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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